폭풍치는 바다 속 네 시간…작품 위해 목숨 내건 화가, 터너 [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입력 2022-08-07 16:48   수정 2022-08-08 00:43


폭풍우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해 보인다. 이때 배에 타고 있던 한 남자가 돛대에 기대어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기 시작한다.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미스터 터너’(2014) 속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모습이다. 터너는 ‘영국 국민화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영국 대표 미술관 테이트갤러리는 매년 젊은 미술가 중 한 명을 선정해 최고 권위의 미술상 ‘터너상’을 주고 있다. 영화에선 ‘스위니 토드’ 등에 출연한 배우 티머시 스폴이 터너 역을 맡았다.

영화처럼 터너는 폭풍우와 눈보라가 몰아치던 배에 자신을 묶어 네 시간이나 버텼다고 한다. 그가 이런 일까지 한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터너는 단순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만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기고, 몸소 체험하고 느낀 바를 화폭에 담았다.

그가 온몸을 던져 가며 완성한 작품은 ‘눈보라-항구 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사진)이다. 폭풍우와 눈보라를 거친 붓질로 소용돌이가 치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터너가 돛대에 묶인 채 느낀 감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터너는 가난한 이발사 아버지와 정신질환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일찌감치 영국 화단을 평정했다. 많은 부와 명예도 누렸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터너는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가만히 한자리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진 않았다. 위험한 상황에도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했다.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화산 가까이에 갔을 정도다.

그는 풍경화에도 역사와 사회 등 다양한 이슈를 담아내려 했다. ‘노예선’은 영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영국엔 노예를 사고파는 노예상들이 있었다. 작품은 노예상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순간을 담았다. 이때 선장은 노예들을 바다에 내던지라고 명령했다. 이 배는 보험에 가입돼 있었는데, 노예들이 자연사하면 보상금이 없지만 실종되면 보상받을 수 있었다. 선장은 노예들이 자연사할까 봐 먼저 바다에 빠뜨린 것이다.

영화엔 터너가 사진관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막 보급되기 시작한 카메라를 보며 씁쓸하고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불안처럼 오늘날 카메라는 터너가 온몸을 던져 가며 그림에 담았던 순간들을 훨씬 쉽고 간편하게 포착해 낸다.

하지만 터너의 그림이 주는 감동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스스로를 불태우며 직접 체험하고 느낀 바를 고스란히 표현하고, 세상의 이면까지도 담아내려 했던 터너. 이렇게 뜨거운 열정이 들어간 작품만큼 사람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게 또 있을까. 아무리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이 발전해도 사람의 영혼이 깃든 예술이 영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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